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거 제도 (문단 편집) === 단점 === >네가 곡산에서 공부하다 집으로 돌아간 뒤 내가 과거공부를 하라고 한 적이 있었지. 당시 주위에서 너를 아끼던 문인이나 시를 짓던 선비들은 '''본격적인 학문을 시킬 일이지 과거 따위나 시키고 있느냐'''고 모두 나를 욕심쟁이라고 나무랐고 나도 마음이 허전했었다. >------ >─ [[정약용]], 1802년 12월 22일 강진에서 귀양 살면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단점으로 제일 먼저 지적되는 문제가 사회가 경직된다는 점이다. 먼저 과목이 국가 기득권에게 유리한 것으로 결정되기에 기득권층이 원하는 사상을 사회전반에 강요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이외의 새로운 사상이나 발견을 허용하지 못하여 오히려 탄압하게 되어 사회가 퇴보한다. 조선과 중국은 사회가 유학적 관습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면 갈수록 유학적 사고를 더 강요하여 결국 국가가 퇴보해, 19세기쯤 가면 조선과 중국은 서구권에 비해 전방위적으로 밀리게 된다. 다만 이는 과거제 때문에 그렇게 됐다기보단 특정 사상을 강요할 수 있는 기득권의 막강한 권력이 이미 존재했고 그것이 과거 제도로 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는 유교사상이 뿌리박혀있었고 유교사상은 왕이 폭정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왕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하였기에 결과적으로 왕이 원하는 사상을 사회에 강요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울 일이 아니었지만 유럽은 [[봉건제]]가 뿌리깊게 남아있었기에 왕이 사회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이었고 봉건귀족 외에도 부르주아, 성직자, 길드, 대학, 도시, 장원 등 다양한 계급, 이익집단, 공동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절대왕정]]이라고 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이는 3세기 남짓한 기간에 불과했고 이것도 중국과 한반도에 비하면 별것 아닌 수준이었다. 당장에 절대왕정이라고 하는 시기에조차 유럽의 왕들은 저런 조직들을 복종시키진 못했다. 즉 애초에 유럽은 사회 전반에 기득권만을 위한 사상을 강요할 여유가 없었다. 당장에 지배층조차도 서로간에 이권을 다투기 일쑤였다. 만약에 왕을 향한 절대충성을 강요하려면 왕은 같은 지배층인 귀족, 성직자 등부터 복종시켜야 했지만 이들은 당연히 그럴리가 없었다. 만약 유럽에서 기득권의 이념을 반영한 과거 제도 같은 시험을 도입해봤자 사회 조직들은 신경도 안 썼을 가능성이 높다.] [[유교]] [[철학]]이 더 이상 시험 필수과목이 아닌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과거 시험의 필수과목이던 유교 [[경전]]을 달달 외우는 걸 잘 하는 인재가 정말로 효율적이고 유능한 인재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점도 있다.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이 필수과목이라 해외에서는 오히려 과거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또한 아무리 실무 지식으로 시험 주제를 구성하여도 막상 실무에 들어가면 반드시 괴리가 생기기 때문에 실제 시험 성적과 실무 실력의 차이가 반드시 드러난다. 대체로 실무실력이 나중에 시험 성적을 따라가기에 잘 부각되지 않는 맹점일 뿐 분명 시험만능주의의 폐단 중 하나이다. 실무지식만으로도 이런데 유학만을 다루는 과거제는 더 심했으며 단순한 '''학문의 경직을 넘어 정책의 경직까지 퍼졌다.''' 도입 초기인 세종 때까진 문제 없이 잘 굴러갔으나 결국에는 유학에만 빠삭한 인재가 관직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 특징상 이후의 국왕대에서 점차적으로 정통 성리학파인 사림파가 대두되면서 조선은 점점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사림파]]의 비판 참조. 게다가 시험에 의한 인재 선발의 전체적인 문제로 바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별하지는 못한다. 시험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성격이 개차반이라도 들어갈 수 있는 점이 최악의 문제점이다. 이점은 현대의 공무원 선발 시험들도 마찬가지긴 하다. [[인성|사람의 됨됨이]]가 인재 선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나오는 최악의 경우가 현대에도 있는데 일반 공무원들도 그렇지만 특히 권력을 주름잡는 정치검사/판사들이며, 그들의 권력을 위해 뒤를 봐주는 집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중요 직책을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이 맡을 때의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인성 부분에 한해선 차라리 과거제도 발달 이전 고대 동양에서 [[천거]]하던 시절에는 이런저런 대비책이 있었다. 추천해서 등용된 자가 사고를 치면 추천한 사람도 같이 털렸기 때문에 추천권을 가진 사람이 평소 행실을 체크해서 신중히 추천했기 때문에, 아는 건 많지만 인성이 개차반인 사람을 거를 수 있었다. 실제로 [[조광조]]는 성적으로 뽑는 과거시험이 행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현량과를 제안했고[* 정작 그렇게 해서 만든 현량과는 '우연히도' 조광조와 가까운 사람들만 선발되어 과거제만도 못한 결과를 낳았다. 단적으로 조광조와 가까웠던 안당은 자식 셋이 합격했다.] 그 외에 몇몇 실학자들처럼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천거제도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천거제의 단점이 과거제의 단점보다 많기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지만 과거에도 과거제의 단점을 인식하여 대안으로 제시할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성리학적 유교 사상에 의한 정치체제를 더욱 공고화됨에 따라 과거시험의 비중은 더욱 커졌고, 사회적으로도 사람이 출세하려면 사실상 과거 시험을 합격하여 양반이 되는 것 외에 별다른 게 없다보니 소위 ‘과거만능주의’ 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일단 과거 자체가 워낙에 준비기간이 긴데다가 난이도까지 어렵다보니 수험기간만 수십년이 넘은 수많은 장수생을 양산했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서얼이나 평민들까지 과거시험을 준비할 정도로 응시생만 10여만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합격률은 더욱이 낮아졌다. 합격도 이러한 상황에서 임용은 더욱 끔찍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 기득권이 보수화 되어가면서 최고위층 유력 가문만 임용이 되는 상황이 펼쳐지다보니 과거 합격을 통한 관직 임용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최소한 양반 지위라도 유지하기 위해[* 양반이 되는 방법은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방법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돈으로 족보를 조작하거나 직첩(벼슬 임명장)을 사서 신분세탁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과거, 최소한 소과라도 합격하여 유학호 지위를 얻는 것이다. 돈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로 눈을 돌릴수밖에 없다.] 생업을 내팽개치고 일생을 과거시험에만 매달리는 폐단을 낳았고, 고시낭인이 됨은 물론 집안까지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이 사람들을 현대의 시각으로 단순한 잉여인간이자 등골브레이커 정도로만 폄하할 수는 없다. 당시의 과거 준비생들은 합격 자체가 자신의 입신뿐만 아니라 가문 자체의 생존과도 직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어렵고 긴 시간동안 준비해서 과거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과거 합격자들은 과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한문 실력이 없는 사람에 대해 강한 차별의식을 가졌고, 그 대상이 국왕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조선 [[영조]]는 즉위 전에 경전 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즉위하고 나서도 상소문이나 신하들의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때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영조를 무시했다. 이는 영조의 컴플렉스가 되어 [[사도세자]]가 공부를 게을리하거나 따라가지 못할 때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다그치게 되며 나중에는 아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영조 본인도 경전 공부에 노력을 했는지 나중엔 신하들이 쩔쩔 맬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시험 제도는 그나마 다른 방식에 비해 공정하기는 해도 관리 감독이 잘 이루어져야 이러한 장점을 유지할 수 있다. 시험 잘 봐봤자 담당관이 멋대로 조작해버리면 합격하지 못하며 시험을 개차반으로 봐도 담당관이 뒤를 보면 합격할 수도 있다. 현대에는 여러가지 부정행위 방지 대책을 만들어놨지만 조선시대엔 이런 부분이 훨씬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조선 말기의 과거제가 이러한 폐단이 심했다. 예를 들어 그 사림파도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옹립하면서 '산림직'이라는 특권을 얻는데, 과거시험 없이 다이렉트로 벼슬을 받는 제도였다. 일본의 "일중 비교 교육사"에서는 중국에서 서양 학문의 도입이 지연된 이유 중 하나로 중국의 학문 교육이 경직화 되었고, [[에도시대]]의 일본 학문과는 유연성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근대화가 늦은 이유의 하나로 '과거 제도의 영향'을 꼽기도 한다. 중국은 과거에 급제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관직을 얻어 권력을 쥘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정권의 중추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교육의 중심은 과거가 되었고 사회 전체의 지식 강화보다는 '''개인의 입신양명에 필요한''' 유학 이외의 학문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이렇다보니 사회는 관료제의 특성상 경직되고 유학 이외의 과학, 의학 같은 실용적이지만 과거 급제에는 한톨의 도움도 안되는 학문이 천대받는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유학을 제외한 나머지 학문의 발전이 매우 지체되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중국의 학습자는 지위와 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되었으며, 권위와 권력에 밀접하여 논쟁적, 창조적인 학문이 배제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과거 제도를 시행한 조선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논리이며 실제로 조선도 이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